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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흔적기관

규도자 (gyudoza) 2022. 9. 9. 01:07

예전에도 몇번 말했듯, 난 원래 있는 개념을 조금 뒤틀어서 내식대로 이해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엔 흔적기관을 이용해볼 것이다.

 

 

인간에게는 쓰진 않지만 진화의 흔적으로 남은 부산물들이 존재한다. 그 종류는 맹장, 사랑니, 꼬리뼈 등등이 있겠다. 흔적기관의 특징이 뭐냐. 싫어도 들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데 필요하진 않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

 가난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남기는 생활양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부제목에 달았던 가성비형 인간이라는 표상이 가난의 흔적기관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왜냐. 내가 그랬고 부단 나 뿐만이 아니라 소위 가난했지만 어느정도 그 티를 벗어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히 가난이라는 상처의 흔적이 마치 인간의 장기, 기관마냥 똬리를 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성비형 인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그대로가 가성비형 인간이다. 어떤 걸 하려고 하면 무조건 거기에 드는 돈부터 생각나고 그돈이면 라면이 몇개고 몇달치 교통비고 몇달치를 버틸 수 있고 등등에 대한 계산부터 들어가는. 그리고 특히 이런 유형의 사유가 위험한 이유가 따로 있는데, 이런 생각이 계속되면 무형의 자산을 구입한다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내가 그랬다.

 여기서 말하는 무형의 자산이란 무엇인가. 강의나 학원 등 교육에 대한 부분,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게임 처럼 마음만 먹으면 불법으로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들. 뮤지컬이나 오페라 처럼 예술적 가치를 제공하는 것들 등등 많은 것들이 있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자연스럽게 구매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일부러라도 내가 학생 시절에 저질렀던 과오를 씻는다는 느낌으로 구매하고 있다. 

 왜 이런 생활양식을 갖게 되는가?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자아형성기의 많은 부분을 생활이 아닌 생존이 차지하고 있었으면 이렇게 된다. 무형의 자산에 돈을 써볼 일도 없었으니 그를 통해 얻게 되는 부가가치에 대해서 아예 알지 못하는 상태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애초에 무형의 자산에 돈을 쓴다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이런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당연한 행위에도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게 된다.

 

 

 

 

내가 어느정도 이 가난의 흔적기관을 탈피하게된 계기가 있는데 그건 정말 어이없게도 코로나다. 코로나로 많은 자산가격이 상승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무엇인가를 한다(집을 사거나 가게를 차린다거나)는 개념이 상실되니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00만원이 넘는 맥북을 사고 강의를 사고 공부를 하고 게임을 샀다.

 

 

비싸게 산 맥북은 아직도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비싼 것이 됐고, 내가 좋은 직장을 갖게 해주었고.

내가 사서 봤던 강의는 나라는 인간을 시급으로 계산해봤을 때 그 강의 가격동안 공부해도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쉽게 알려주었고.

정당하게 가격을 주고 즐겼던 게임은 어렸을 적 불법다운으로 즐겼던 게임보다 훨씬 몰입도 잘되고 재미있었고.

돈을 낸 전시에는 그만큼의 미적 가치가 있었고, 돈을 낸 공연은 그만큼 내 삶의 관점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주식시장에 옛날부터 존재했던 큰 화두가 하나 있다. 과연 "적정가격은 존재하는가?"이다. 이 문장을 해석하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한쪽은 "항상 지금의 주식가격이 적정가격이다"이고 다른 한쪽은 "시장에는 언제나 저평가, 고평가 상태가 존재한다"라는 관점이다. 가난의 흔적기관을 탈피하기 위해선 전자의 스탠스를 소비자가에 적용해보면 된다. 그러면 전자의 문장은 이렇게 변한다.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소비자 가격이라는 건 공급자가 정하는 것이므로 주식시장처럼 유동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늦게라도, 혹은 정말 빨리 가격이 변하는 것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정가격대를 유지하면서도 꾸준한 공급과 수요가 이뤄지는 물건, 혹은 유무형의 자산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시장에서 그만한 가치를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자신이 가난의 흔적기관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의식적으로라도 한번 그런 것들을 소비해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정도 탈피를 했지만 아직도 명품이나 비싼 옷은 못산다. 내 사정이 얼마나 좋아지든 말 그대로 가난의 흔적기관은 나라는 인간에 남아 계속해서 나의 생활양식을 옭아맬 것 같다. 그로 인해서 손해보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미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어떤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혹자가 그랬듯, 문제 해결의 가장 첫번째 단계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니 난 내가 가난의 흔적기관을 지닌 가성비형 인간이라는 걸 의식하고 있으니 그래도 해결할 수 있는 토대는 마련돼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탈피를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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