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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실패로부터 배우다

실패로부터 배우다 - 2. 웹툰 글작가

규도자 (gyudoza) 2021. 7. 2. 20:52

난 웹툰 글작가를 했었다. 아니, 데뷔를 못했으니 글작가 망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화 잡식이라 옛날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영화, 만화, 애니, 게임, 소설 등등을 즐겨왔었다. 지금은 흥미가 떨어져 그 밀도가 좀 줄어들긴 했지만 말이다. 그 장점을 살려보자 해서 선택한 직업이었다. 만화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했고.

 

아무튼 특전부사관을 전역한 뒤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그래, 해보고 싶었던 것 하나하나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던 것 같다. 특전사 시절은 비록 장기를 희망했다가 안맞는 것을 깨닫고 전역하긴 했지만 야전 전환 없이 몸 성히 전역한 것만으로도 내 인생 몇 안되는 성공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외하였다.

 

아무튼 웹툰 글작가라는 목표를 정한 뒤 각종 작법서를 탐독하고 콘티를 그리고 스토리를 짰다. 내가 웹툰 작가가 아닌 웹툰 글작가로 목표를 잡은 건 그냥 단순히 그림을 못그렸기 때문이다. 굳이 일반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잘그리는 축에 속하지만 뭔가 만화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림작가를 구할 필요가 있었는데 또 이 그림작가를 구하기 위해선 매력적인 스토리를 써놔야 했다. 그래서 완성해놨던 스토리가 세 개 있다.

 

 

하나는 "EXIT(Extra ordinary investigation team)"이라는 작품이다. 내용은 서울 광수대의 한 좌천부서로 불리우는 팀에 이상한 사건이 접수되는데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초자연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상한 사건이 접수된 것인데 이를 해결할 순 없고 또 접수는 받아야 하니 경찰 내부에서 계속 여기저기 밀려 이 광수대 좌천팀에까지 이관된 것이다. 그 사건은 투명인간에 의한 폭행사건이었고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사건 내용에 비해 실제 발견되는 증거들을 수사하면서 밝혀지는 서스펜스 이야기이다.

 

하나는 "성전사 아리스"라는 작품인데 이건 흠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 주인공이 여자였는데 뭔가 여자는 금기시 돼있던 성전사가 되면서 활약하는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글을 쓰니까 굉장히 흐릿하게 콘티가 기억나는데 아리스가 마녀로 몰려서 사형장으로 향하고 있었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과거회상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태였다.

 

하나는 "심심풀이 어플"이라는 작품이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동화 중에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항상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떤 잼민이가 실이 나오는 구슬을 주웠는데 그걸 당기면 시간이 빨리 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잼민이는 학교도 너무 재미가 없고 그래서 삶에 자기가 싫어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 실을 계속해서 당겼고 결국엔 뭔가 해보기도 전에 늙어 죽게 되는데 그 순간 앗 꿈이었네 하면서 현실로 되돌아오는 줄거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처럼 주인공은 따분함을 못참는 고딩인데 우연히 "킬링타임"이라는 어플을 다운받게 된다. 어플을 켜보니 자기가 설정한 시간만큼 점프가 된다는 걸 발견하고 원래 동화에서의 잼민이마냥 자기가 싫어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이 어플을 키게 되는데 이 주인공이 싫어하는 순간에는 공부시간이나 시험기간 등이 포함돼 있다. 근데 문제는 자기가 싫어하는 순간을 넘길 때마다 나오는 의식 못하는 자아가 진짜 자기자신보다 훨씬 좋은 퍼포먼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버리면서 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높은 시험성적을 위해 어플을 키고, 다른 학생무리에게 맞을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어플을 키는 식으로 하다가 점점 자아가 먹히는...? 뭔가 이토준지 이야기 같기도 하다.

 

 

뭐 아무튼 이런 이야기들의 시놉시스를 써놓고 그림작가를 구했다. 세작품 모두 관심을 받았는데 실제로 경력있는 그림작가와 협의가 이뤄져 한 화 이상 나온 작품은 EXIT가 유일하다. 하지만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바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실패의 이유는? 천재지변이다. 그림작가님의 집이 전소되어 컴퓨터와 타블렛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자료와 작업환경까지 모든 것이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아직도 이렇게 서로 작품을 논의하면서 오고 갔던 캐릭터 컨셉아트는 존재한다. 지금 봐도 그림이 정말 기똥차다. 1화분의 원고도 있지만 그거까지 올려버리면 글의 분량이 말도 안되게 길어지게 되고 또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사건은 어느날 예고없이 찾아왔는데 계속해서 작품 관련해서 논의를 이어가던 도중 그림작가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 기간이 길어졌고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서 혼자 작품의 내실을 다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톡으로 사진과 함께 연락이 왔었다. 사진은 까맣게 재가 돼버린 주택이었고 내용은 뭐... 예상할 수 있다시피 못하게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꽤나 본격적으로 얘기가 오고 갔고, 경력이 있으신 분이니 주변 인맥과 함께 연재처까지 정해져서 다른 작품들에 대한 논의는 제끼고 이것에만 올인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리니 나도 멘탈이 많이 나갔었다. 물론 모든 재산이 화마에 휩쓸린 사람보다는 덜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도 꽤나 큰 시간적,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바로 옆에 나의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뭔가 아직도 굉장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도 슬픈데 슬픔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하나. 이러한 감정적 경험들이 그러하듯이 이 사건은 나를 좀먹었다.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웹툰 글작가에 대한 목표는 고이 접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화덕후인 친구에게 읽혀봤을 때 별로 재미없다는 평가를 들었다. 웹툰의 트렌드는 청소년이고 심지어 성인들도 청소년물을 보는 게 만화시장인데 성인물로 생각을 해놓고서 소재 또한 고리타분한 수사물이니 제대로 런칭 됐더라도 오히려 성공하긴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게 생각이다. 물론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뭐 안 된 건 안 된 거지...

 

 

이번의 실패로 배운 점은. 뭐 작품 쓰는 법, 만화 콘티 쓰는 법, 스케치업으로 배경 만드는 법 등등이 있겠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모두 쓸 데 없는 것들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실패로부터도 배우는 게 있다지만 실패보단 성공으로 배우는 게 많고, 실패는 주체자에게 피해를 주지면 성공은 주체자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결국 실패는 포장이고 무조건 성공이 낫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실패로부터 배우다라는 시리즈도 어떻게 보면 내가 해왔던 일들에 대한 스스로의 합리화나 변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싶다. 실패를 정말 많이 해왔지만 나는 그래도 얻은 게 있어! 하는 느낌으로 써보려고 했는데 쓰면 쓸수록 잃은 게 많은 것 같다. 흠. 자신의 치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같아서 뭔가 씁쓸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어나가보려고 한다. 다음의 실패시리즈는 웹툰 글작가의 꿈이 좌절된 뒤 친환경 디자인 스타트업 공동창업자로서 실패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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