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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가타카에서 진짜 제롬(주드 로)이 자살한 이유

규도자 (gyudoza) 2021. 6. 4. 17:11

급식시절 꼭 학교에서 틀어주던 영화들 중 가타카가 있었는데 당시에 굉장히 재밌게 봤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뭔가 유전자로 모든 걸 평가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숨기고 우주로 올라간다는 간단한 시놉시스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보게 됐다. 역시 명작은 명작이더라, 시간이 지나도 그 재미는 여전했다.

 흐릿하게 있었던 "재미있었던 영화"라는 이미지가 지금에 와선 에단 호크와 주드 로, 그리고 우마 서먼의 젊었을 때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으면서 과한 미장센 없는 SF가 이렇게도 재미있고 뜻깊을 수 있구나. 그리고 여전히 재미있구나! 하는 다채로운 생각과 함께 진해졌다.

 

 

하지만 급식시절 봤을 때 기억속에 전혀 없던 새로운 장면이 있었다. 바로 주인공 빈센트에게 우성 유전자 정보와 신원을 제공한 제롬의 자살이다. 빈센트가 유전자라는 틀을 깨고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됐을 때 제롬도 여행을 간다고 하면서 쓰레기 소각로에서 자살을 한다. 왤까...

 

 

현대사회에 있어서 흔히 자살의 원인으로 꼽히는 건 스트레스, 혹은 그로 인한 우울증이다. 하지만 제롬은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빈센트가 태어났을 때 피검사를 통해 집중력 장애와 심장장애 등을 검사한 것처럼 만약에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우울증 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것이 밝혀졌을 것이고 우성인자로 등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빈센트의 부모님이 배아를 고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우울증 인자를 갖고 있는 배아는 아예 태어날 기회조차 배제됐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인공수정을 담당하는 의사가 그런 요소들은 제거해준다. 그리고 인공수정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은 의사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유전적으로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천번을 임신해도 다신 없을 정도로 완벽한 유전자상을 띄게 된다. 이걸 확률적으로 따져봤을 때 자연임신으로 잉태된 인간이 우성유전자를 가진 단체에 소속되는 건 최소 0.1% 이하의 확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제롬은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우성유전자를 가진 인간이며, 이의 자살은 스트레스나 우울증에 의한 게 아니다. 왜냐. 애초에 제롬은 우울증이 발현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건 어떤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수사관이 제롬의 신원을 조회할 때이다.

제롬은 휠체어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열성유전자를 가진 수사관을 하대하고 화낸다.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제롬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반불구가 된 몸을 갖고 있더라도 그와 상관 없이 진짜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밖에도 제롬과 빈센트가 처음 만났을 때 수영 은메달을 보여주면서 "난 지금 이모양 이꼴이지만 제롬이라는 사람은 이정도여야만 한다. 할 수 있겠냐"는 식으로 빈센트를 쏘아 붙인다.

 

 

그러니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우울증, 스트레스에 의한 자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뭘까 계속 생각해봤다. 영화를 보면 유일하게 스스로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부분을 살펴보면 뭔가 힌트가 있다.

그렇다. 제롬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자살을 결심했고 차로 뛰어들었지만 자살에 실패해 불구가 된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신원을 공유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안티테제인 것이다. 열성유전자로 모든 것을 이뤄내는 빈센트와 우성유전자로 모든 것에 실패하는 제롬.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빈센트의 꿈을 의미하는 로켓이 점화됨과 동시에 제롬이 스스로를 우겨넣은 소각로가 점화한다. 2등을 의미하는 은메달은 불빛에 반사되어 금메달이 된다. 그렇다. 제롬의 자살은 제롬의 "성공"인 것이다. 과거 술에 취해 주정했던 것처럼 자살에 실패했지만 절대 좌절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빈센트가 유전자라는 이름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서로의 안티테제적인 인물로 존재하는 두 인물이 하나의 신원을 공유하고, 한 명의 성공은 꿈과 자아의 실현이고 한 명의 성공은 자신의 소멸이었다. 이렇게 두 인물은 서로 협력하지만 서로가 완전한 양극단에 있는 음과 양의 존재였다. 오랜만에 봤지만 정말 다시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땐 그저 과학이 발전한 시대의 삭막한 이야기 정도로만 느껴졌던 이야기였는데 그냥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말이 안되는 작품이었다.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목표가 자신의 소멸인 사람의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휠체어를 타고도 유쾌해보였던 제롬의 그 모습이 뭔가 슬프게도 느껴졌다. 어찌보면 빈센트의 꿈에 대한 의지는 의도치 않게 자신의 친구를 파멸로 이끄는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비록 그게 제롬이 원하는 바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곱씹을수록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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