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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21년 마지막날에 생긴 일들

규도자 (gyudoza) 2021. 12. 31. 23:06

보통 매년 마지막 날에는 연례 행사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는 한다. 고난의 행군이란 무엇이냐, 그냥 10~20시간 가량을 정처없이 걷는 것이다. 연말 뿐이 아니라 내가 이따금씩 하는 행동인데 이렇게 하면 몸이 힘들어서인지 머릿속에서 정말 중요한 생각들만 남고 심지어 그 중요한 생각들이 정렬된다. 이 알고리즘은 무엇일까. 자학정렬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2020~2021년이 정말 내 인생에 다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했다. 이기간에 직업은 5번 바뀌었고 실패한 프로젝트는 9개가 있다. 근데 정말 다행이도 2021년 마지막 즈음에 되려니 상황이 좀 풀렸다. 그래서 딱히 자학정렬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학정렬보다는 좀 더 커리어적으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이 생겼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자학보다는 공부를 택했고 내 마음의 고향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근데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가니까 코로나 때문인지 앉아서 있는 곳들을 다 없애버렸더라. 근데 그냥 통행객들이 무자비하게 많더라. 그래서 뭔가 방역효과가 있으려나 싶다가도 같은 자리를 수십수백명이 바꿔가며 앉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더라. 뭐 아무튼 책 읽을 곳이 없으니 주변 스벅에 가서 로드맵을 그려봤다.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지 팬과 노트로 정리를 했다. 집에 있을 때는 죽어도 안되는 게 슥슥 막힘없이 잘 됐다. 

 

 

 그렇게 2022년 로드맵 설정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평소에 염두에 뒀던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이태원 수제버거. 그래서 고난의 행군 미니버전으로 광화문에서 이태원까지 걸어갔다. 네이버 지도로 봤을 땐 큰 길 따라서 남산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 깔끔한 루트였지만 이게 뭐람, 당연히 그건 차량용 도로였고 난 여기저기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졸라 해매며 영하 1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땀이 날 정도로 많이 걸어다니게 됐다. 지도를 확대해보면 막힌 길이고 연결된 길이 없고 또 산주변 동네라서 그런지 언덕은 또 자비가 없고... 그렇게 걸으니까 마스크가 입김 + 결로현상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마스크 도모지형을 받는 느낌이었다. 아, 도모지 형은 얼굴에 창호지를 붙이고 물을 부어 숨을 못쉬게 하는 조선시대 고문 혹은 사형방법이다.

 

광화문에서 이태원 가는 길. 오늘은 러시아기단형님이 이겨서 춥고 공기가 맑다.

 그렇게 셀프고문 + 미니등산을 해가며 이태원에 도착했는데 앞에 배달아저씨가 오도바이에서 내리려고 했다. 근데 그 아저씨도 길을 해매느라 정신이 없으셨는지 바이크 걸쇠를 안채우고 그냥 내리셔서 핸드폰을 보고 집을 찾으시더라. 그래서 오토바이가 내리막길쪽으로 굴러가면서 넘어질뻔해서 호다다닥 가서 잡았다. 진짜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가서 양쪽 손바닥에 상처도 쬐끔났따 ㅠ. 다행히 옷은 안찢어졌다. 동묘 구제시장에서 산 6천원짜리 내 소중한 퓨마패딩.

 아무튼 뒤에 막 캐리어끌고 오르막길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냅두면 진짜 굴러가서 사고나겠다는 생각이 팍 들어서 몸이 바로 나갔던 것 같다. 내가 갑자기 자기 오토바이를 확 잡으니까 배달아재도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더니 상황 파악하시곤 진짜 고맙다고 고맙다고 몇번을 하시더라. 하지만 난 부끄러워서 네~ 하고 바로 갔다 마치 Like 무멘라이다.

따봉

 

바로 가서 롸카두들 내슈빌 핫치킨버거를 조졌다.

6년째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가방양"이 앞자리를 채워주셨다.

인터넷으로 소문듣고 찾아갔는데 맛있었다. 하지만 난 햄버거 원리주의 학파라서 치킨버거는 햄버거로 치지 않는다. 치킨버거는 그저 동그란 치킨샌드위치일뿐.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무자비하게 기름지고 핫치킨이면서 양념이 발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식 양념치킨처럼 단맛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특히 치킨의 진한 매운기름을 듬뿍 머금은 저 식빵이 오지게 맛있다. 대체로 만족.

 

 

 

하지만 진짜 맛집은 따로 있었다.

단순하지만 묵직한 메뉴판

버거스낵이라는 곳인데 오후 6시에 연다. 사실 롸카두들은 시간이 남아서 간거다. 이태원에 5시에 도착해버렸으니 남은 1시간동안 뭘할까. 다른 햄버거를 먹자. 참 돼지스러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버거스낵. 이세상 힙함이 아니다. BI에 굴림체를 쓰면서 감튀도 안팔고 치즈버거 단일메뉴인 햄버거집이 있는데 햄버거가 맛있다. 내가 사실 십수년전에 햄버거집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아직도 그 햄버거집에서 만든 햄버거보다 맛있는 버거를 못먹어봤다. 그 니즈때문에 항상 햄버거집을 찾아다니곤 하는데 여기서 파는 햄버거가 거기서 팔았던 메뉴 하나와 비슷해서 너무 반갑고 맛있었다. 무슨 사혼의 구슬조각이나 드래곤볼마냥 그 햄버거집과 비슷하게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과거 햄버거집에서 팔았던 메뉴는 어니언 모짜렐라버거라고 해서 볶은양파에 모짜렐라치즈, 그리고 패티만 들어가는 심플하면서 묵직한 맛이었는데 여기서 파는 치즈버거도 비슷하다. 야채는 볶은양파가 끝이고 패티와 슬라이스 체다치즈 + 사각형 모짜렐라 치즈가 내용물의 끝이다. 근데 쥰내맛있다. 사실 이 버거집에 가게 된 계기는 구글 평점이 5.0점이길래 간 거다. 평가가 다 5.0이다. 1점 2점 3점 4점 그런 거 없다. 다 5점이다. 아마 또 이태원 주변에 가게 되면 꼭 먹게 될 것 같다.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맛집 느낌인데 뭔가 소문 한번 나면 인기 터질 것 같다. 이런 집을 찾게 되면 꼭 딜레마에 빠지는데 사장님이 돈 많이 버셨으면 하는 마음 + 안바빠서 내가 먹고 싶을 땐 언제든 다시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게 된다.

 

 

아무튼 내가 오픈 전에 와서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예전에 일했던 가게에서 먹었던 버거만큼 맛있는 버거를 찾아다니면서 먹고 있다고 하니까 사소하지만 감동적인 혜택도 주시고 서비스도 주시고 굉장히 좋았다. 닉을 규도자로 정했는데 무슨 버거찾는 구도자가 된 느낌... 아무튼 강추한다. 지나가면서 있으면 꼭 먹어보시길.

 

 

 

 

2021년 정말 다사다난했는데 고민도 몇 개 해결되고 마지막날에도 이렇게 좋은 일들이 생기니 기분좋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에서 안보내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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